한국 사회에서 대학 서열화는 해묵은 과제이자 견고한 현실이다. 서열을 ‘문제’로 여기는 도덕과 ‘현실’로 수용하는 실용적 습관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입시는 서열을 만들고, 사회는 이를 평판과 자원 배분의 통화(通貨)로 유통하며 견고한 악순환의 굴레를 완성한다. 이 과정에서 대학의 이름은 하나의 숫자로 압축된다. 그 숫자는 교육의 질을 설명하기보다, 서열 게임 참여자들을 맹목적으로 만들거나 안심하게 하는 각성제와 진정제로 기능할 뿐이다.
현실에서 대학 랭킹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다. 방만한 대학 경영을 제어하고, 유학생 유치 등 국제 시장에서 최소한의 정보 신호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물결에 올라타는 것만이 유일한 답은 아니어야 한다. 오늘날 ‘글로벌 랭킹’은 평가보다 정교한 자본주의적 상품에 가깝다. 나아가 서열을 부추기고 기생하는 ‘랭킹 산업’이라는 그레이 마켓(Gray Market)이 존재한다. 고등교육의 가치를 몇 개 지표로 축약해 줄 세우는 행위는 판매를 위한 장사치의 저렴한 속셈이다.
자본주의는 비교를 선호한다. 비교할 수 있어야 거래의 언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은 생산공장도, 주식도 아니다. 서로 다른 임무를 가진 조직들을 한 줄로 세우는 순간, 대학은 고유 사명 대신 ‘랭킹 임무’를 수행하는 시장 권력의 호구이자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1983년, <U.S. 뉴스 앤 월드 리포트>가 대학 순위를 상품화한 이후, 국내에선 1994년, <중앙일보>가 도입하며 언론사 주도의 시장을 열었다. 이들은 ‘명성’을 점수로 환전하며 현재의 기득권을 미래 권력으로 공고히 하는 메커니즘을 판매했다. 글로벌시장의 영리 평가 기업들의 행태는 노골적이다. 영국 QS는 ‘공신력’의 탈을 쓰고 설문 기반 평판도에 과도한 비중을 두며 서열을 고착화한다. 중국 ARWU는 노벨상 실적 등 극단적 연구 성과만 지표화해 대학을 ‘논문 기계’로 압박한다. 2010년 이후엔 중동 업체까지 그 시장에 뛰어들었다. 여타 업체도 강조점만 다를 뿐 행태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 산업 생태계 내에는 기묘한 ‘이해 상충’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평가기관이 동시에 컨설팅을 파는 공급자라는 사실은 어떤 정당화 논리가 따라도 정의롭지 않다. 여기에 종사하거나 관련되었던 개인들까지 시장 참여자로 등장하며 그 생태계는 날로 커지고 있다. 대학은 교육 대신 점수를 숭상하고, 자원은 ‘랭킹 최적화’ 컨설팅과 마케팅에 낭비된다. 국내 대학 랭킹 사이트는 대학의 유료 광고가 가득하다. 갑작스레 단기간 순위가 치솟는 대학이 등장하고, 마케팅 자원이 되자 거대 대학도 눈치를 본다.
최근 국립 특수대학이 설문 왜곡 시도로 국제 평가에서 퇴출되고, 2023년 52개 대학의 보이콧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서 최상위 사립 대학이 국제 평가기관의 총장 회의를 유치하는 풍경은 랭킹에 중독된 대학의 추레한 민낯이다.
이 기만극의 정점에는 교육부가 있다. 공공성을 수호해야 할 당국이 ‘서울대 10개 만들기’나 다른 국가 지원 사업의 성과지표로 외국 민간기관의 평가를 호출하려는 것은 교육 주권의 자발적 포기다. 유럽이 ‘유멀티랭크(U-Multirank)’ 등을 통해 대학의 다차원적 미션을 존중하는 공공적 대안을 모색해 온 것과 달리, 우리 교육부는 국제적 영리 기업의 잣대를 정책 도구로 수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국가 자원 분배를 영리 기업의 사적 알고리즘에 맡기는 행태는 권력은 누리되 책임은 외주화하려는 관료적 꼼수일 뿐이다. 서열 완화를 표방한 정책이 ‘세계 순위’라는 또 다른 서열을 공적인 표준으로 승인하는 모순을 범해서는 안 된다.
‘순위의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 정부는 랭킹을 참고 자료로 제한하고, 공공 데이터 기반의 다차원 지표-교육 경험, 학문 다양성, 지역사회 기여 등-로 재정 지원 기준을 재설계해야 한다. 순위 생태계의 일원이 되길 거부해야 한다. 대학 또한 ‘순위’라는 가짜 이름 대신 ‘미션’이라는 사명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순서만 숭배하는 국가에서 대학은 결코 사회의 전위이자 최후 보루로서 독립된 지성소로 남을 수 없다.
홍재우 논설위원
인제대 공공인재학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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